
돌아가신 선친께서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바로 "범인은 불가역상(凡人不可逆相)"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보통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역정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며, 이를 결코 숨길 수 없다"*라는 의미다. 나 역시 이 말씀을 삶의 지혜로 삼아왔고, 때때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지나온 인생을 반추해 보곤 한다.
그런데 독일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서양인들에게는 이 지혜가 100% 똑같이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 눈은 홑꺼풀인 데 반해 그들은 대부분 짙은 쌍꺼풀과 큰 눈을 가졌다. 회의나 대화를 할 때 눈을 땡그랗게 뜨고 정면을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언뜻 매우 투명하고 정직해 보인다.
하지만 독일이든 어디든 세상에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겉으로 보이는 정직한 눈빛과 표정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다가는 오류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독일 생활 동안에는 선친의 가르침인 '상(相)'의 개념을 단순한 '얼굴의 생김새'에서 '그 사람의 행동 양식과 삶의 태도'로 확장하여 해석해야만 했다.
이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친숙한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인상들이 참 부드럽고 온화해 보인다. 어린 시절 아버님이 말씀하시던 그 '상'이 예전보다 훨씬 따스해진 듯하다. 어쩌면 이제는 사람을 경계하며 판단하기 위해 그 노하우를 애써 떠올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생각이 든다.
ps) 이 이야기의 배경: 내가 SMART(2인승 자동차)를 한번 리스해서 탄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여성분과 결혼해 사는 Benz 직원이 권해서 그렇게 되었다. 문제는 1년의 리스기간이 끝나고 차를 돌려주러 갔는데 내가 달고 다니던 번호판 (그때 번호가 3050이었다)을 떼어 달라고 하니까(독일은 자기차를 말소하거나 폐차하면 차의 번호판을 떼서 차주에게 준다) 자기들이 퍠기하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해서 그러라고 하면서 리스계약을 종료하고 왔는데 그로부터 3개월 정도가 지났을까? 스위스에서 노란 봉투의 편지가 내게 날라왔다. 내용인즉 "당신차량 3050이 교통법규위반을 했다는 내용과 벌금 150프랑인가를 내라"는 통지서 였다. 완전 깜놀과 함께 분노가 휘몰아쳤다. 첫째 자신들의 말대로 번호판을 폐기하지 않았고 둘째, 아직 리스 계약을 종료지도 않았고 자동차 운행자로 내이름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SMART 리스 부서에 찾아가서 대판했는데 그들은 또 리스 계약을 종료하러 갔을 때처럼 큰 눈을 땡그랗게 뜨고 미안하다는 말대신 "그럴리가 없는데" 라는 말을 반복하기만 했었다. 증말... '변호사에게 맏겼어야 했는데...' 하면서 나의 성질 급함을 또 한번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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